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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I INSIDE - 불굴의 도전정신이 깃든 최고의 한마디 “이봐, 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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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7

- 현대조선 건설의 신화(神話) 같은 실화(實話)

3월 21일은 정주영 창업자의 타계 20주기입니다.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을 세계 최고의 조선 강국으로 키워내신 창업자님을 추모하며, 현대중공업을 설립한 그 분의 발자취를 되돌아 봅니다.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를 견인하던 경공업이 1960년대 말 포화상태에 이르게 됐어요.

아산은 국내 경공업의 후방연관산업으로 중화학공업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죠. 당시 국내의 선박건조 능력은 139개 조선소를 다 합쳐도 15만7천톤(G/T)에 불과했으며, 가동율은 20%에도 못미치는 수준이었어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전략에 맞춰 아산은 국내시장 규모를 초월한 초대형 조선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어요. 과거 1970년대 초까지 수백명의 농어민이 거주했던 작은 시골 마을이었던 울산 미포만을 대상지로 선정했죠.

문제는 조선소를 세우는데 필요한 자금 마련이었어요. 당시 한국의 재정상황은 너무나 열악했기에 외국에서 차관(융자)을 도입해야만 했어요.

목표는 영국의 바클레이즈 은행. 융자를 받기 위해서는 추천서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아산은 영국의 유명한 조선 컨설팅 회사인 A&P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어요.

A&P애플도어사는 ‘한국 정부의 보증도, 현대라는 기업도 상환할 능력도 모두 의심스럽다’는 의문을 제기하며 퇴짜를 놓았다. 이 때 아산은 바지춤의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보였어요.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권. 거북선 담판으로 한국인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호소하며 설득한 끝에 롱바톰 회장의 추천으로 바클레이즈은행과 차관 합의를 이루게 되죠.

그런데 이번에는 선주를 찾아야 했어요. 배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야 영국의 수출신용보증국(ECGD)에서 바클레이즈 은행이 발행한 차관을 승인해 주겠다는 것이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산은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어요.

부지 사진과 사업계획서만 들고 이리뛰고 저리뛰며 끈질긴 노력 끝에 ‘그리스 선박왕’ 리바노스를 설득하는데 성공했어요. 아산의 뚝심을 믿은 그는 현대조선소에 초대형 유조선 2척을 발주한다. 마침내 조선소 건립을 위한 차관을 최종 승인 받게 돼요.

26만톤급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한 아산은 곧장 울산으로 달려와 조선소와 선박 짓기에 착수해요. 여기서 또 한번 아산의 역발상이 빛을 발했죠.

미군공사와 정부발주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해외시장 진출까지 일궈낸 것과 같이 이번에도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진행한 것이죠.

“반드시 다 지어진 조선소에서 선박을 만들어야 된다는 법이 있나?”라고 생각한 아산은 방파제를 쌓아가며 임시도크와 안벽을 만들었어요. 그야말로 웅덩이 안에서 1970년대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26만톤급 유조선을 건조해 낸 것이에요.

이렇게 현대조선소가 창설됐고, 현재의 세계 1위 조선 회사인 현대중공업을 있게 한 역사를 만들어 냈어요. 아산의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는 우리나라 중공업사의 큰 족적을 남겼어요. 최초의 민간주도형 대규모 중화학공업 사업으로 우리나라 중공업의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현재도 국가 주요 산업으로 세계시장을 선도해 나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