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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I INSIDE - 창업자 정신에서 현대의 길을 묻다(3화) - 진취적인 정신이 ‘기적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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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3

[사진]창업자 정신에서 현대의 길을 묻다 3화(1) - 진취적인 정신이 기적의 열쇠 이 이미지에는 네이버 나눔글꼴을 일부 적용했습니다

정주영 창업자는 1974년 조선소를 준공한데 이어 첫 선박인 아틀랜틱 배런(Atlantic Baron)호를 인도했는데, 다음과 같은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태산준령을 넘은 느낌이기도 했었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모든 난관을 불굴의 신념과 불철주야 초인적인 노력으로 극복하면서 함께 태산준령을 넘어준 수많이 이들에 대한 대견함과 고마움도 가득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

 

조선소 건설은 정주영 창업자에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1960년대 말, 우리나라가 건조한 가장 큰 선박은 1만7천톤급이 고작이었는데요. 그런 상황에서 현대가 수십만톤급의 선박을 건조한다는 소식에 주변에서는 한결같이 부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주영 창업자의 의지는 확고했고,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일이나 쉽게 여기면 또 한없이 쉬운 일”이라며 마음을 다잡았죠.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참고 )

비록 현대가 조선업 경험은 없었지만 그동안 여러 종류의 건설에서 얻은 경험 덕분에 철판 설계와 용접에 자신이 있었고, 내부 기계장치는 건물에 냉 · 온방장치를 장착하듯 선박도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계 조선 역사를 새로 쓰다

1972년 3월 23일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를 기공한 이후, 정주영 창업자는 국내 공사의 수주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조선소 건설에 현대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습니다.

매일 2천2백명이 넘는 작업 인원이 투입됐고, 울산 미포만 현장은 낮과 밤이 따로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철야작업으로 안전화 끈도 못 푼 채 자는 사람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하룻밤 새 정문 옆 임시 판자초소가 팔각정 시멘트 건물로 바뀌는가 하면, 어제까지 자갈길이었던 출근길이 아침에 포장도로로 둔갑할 정도였습니다.

창업자도 공사 기간 내내 울산과 서울을 오가며 작업을 진두지휘했고, 새벽에 현장을 둘러보다가 차가 바다에 빠져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적도 있었습니다.

[사진]창업자 정신에서 현대의 길을 묻다 3화(2) - 현대중공업 초창기 도크 전경

△ 현대중공업 초창기 도크 전경

 

이렇게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대역사(大役事)가 2년여간 울산 미포만에서 펼쳐졌습니다.

당시 선진국에서도 이만한 규모의 조선소를 지으려면 건설에만 3년 정도가 걸리고, 선박 건조는 조선소 건설이 끝난 뒤에 시작하는 것이 통례였고 상식이었습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창업자는 조선소는 조선소고 선박 건조는 선박 건조라는 생각으로,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했고, 이를 해내며 세계 조선사의 신화를 새롭게 만들어냈습니다.

 

 

허허벌판에 일군 세계적 기업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을 극복한 이 조선소는 1978년 ‘현대조선중공업’에서 지금의 현대중공업으로 사명(社名)을 바꾸고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1983년에는 14억 달러의 수출을 기록하며, 국내 기업 가운데 최초로 10억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조선업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현대는 처음 조선소 건설을 추진할 때 불가능한 일이라며 비웃었던 일본을 불과 10여년 만에 제쳤습니다.

[사진]창업자 정신에서 현대의 길을 묻다 3화(3) - 현대중공업의 2천번째 선박

△ 현대중공업의 2천번째 선박인 ‘오션 블랙라이언(Ocean BlackLion)호’(2015년 5월 인도)

 

진취적인 정신은 실천력을 높이고, 기적적인 일도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건 정주영 창업자만 지닌 정신은 아닙니다.

선배 사우들도 창업자 정신에 공감하며 불굴의 의지를 발현했기 때문에 허허벌판이던 울산의 백사장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지금, 창업자와 선배들의 정신을 되새기며 경영목표 달성에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도 위기를 극복하고 재도약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