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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 정년퇴직 사우 및 가족 감사편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죠.
정년을 앞둔 사우와 사우가족들의 감사 편지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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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마다 동료들의 힘으로 극복했습니다

 

[황재철 기감 - 현대중공업 의장5부]
[황재철 기감 - 현대중공업 의장5부]

지난 1979년 입사한 이후 줄곧 기장팀에서 근무했고, 올해 영광스러운 정년을 맞았습니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제게는 동료들이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직장생활에서 숱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동료들의 도움으로 이를 견뎠다고 생각합니다.

4남매 맏이로 태어난 저는 형편이 어려운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으로 현대중공업에 입사했습니다. 잔업, 특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월남 갔던 동네 삼촌, 중동 갔던 동네 형님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돈을 벌었습니다.


일찍 떠난 부모님을 대신해 가장으로서 동생들 모두 울산으로 데리고 왔는데, 현재 이들은 물론 손자, 손녀, 조카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습니다. 결혼 이후에는 바로 반장 보임까지 받았는데, 동료들이 옆에서 응원해주지 않았다면 무거운 양어깨를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1996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8도크로 자리를 옮겨, 2야드 창설 멤버가 됐습니다. VLCC 전용이라던 8도크는 조선업 호황 덕분에 일이 많아졌고, 모스형 LNG선과 멤브레인형 LNG선, FPSO, FSRU 등 특수한 선종들을 도맡다시피 건조했습니다.
당시 동료들과 함께 힘을 모아 일하면서 지칠 줄 몰랐고, 어렵게 만든 배를 무사히 인도하는 날은 팀 회식을 하며 회포를 풀었습니다. 어려웠던 순간들은 훗날 무용담이 되어, 우리는 밤새워가며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가끔 옛 동료들과 그때 얘기가 나오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지금은 복잡 다양한 기술을 배우려는 직원들의 열의가 떨어진 것 같아 아쉽지만, 똑똑한 후배들이니 분위기만 조성된다면 더 잘할 것이라 믿습니다.

 

재직 중에 이수한 국내외 교육을 비롯해 사내 직무서클 모임과 봉사활동 등에서 인맥을 넓히고 동료들과 우정을 다지며, 회사와 가정생활에 많은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저와 다른 삶을 이해하는 눈을 넓히고, 평생 함께 가야 할 동반자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한 추억들이 아깝고 형제들도 함께 있는 울산을 떠날 수 없어, 울산 어물동에 텃밭을 구해 초보 농사꾼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니 사우 여러분이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의장5부 동료들과 함께
△의장5부 동료들과 함께

돌이켜 보면,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절친하고 능력 있는 동료를 잃은 슬픔도 있었고, 아끼던 셋째 동생도 앞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동안 업무적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많았을 우리 부서원들과 개선 아이디어를 적극 반영해준 의장 설계부, 사내 협력회사 선후배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얼마 전 마지막으로 받은 회사 동복에 명찰을 달았습니다. 근무복 디자인이 입사 이후로 몇 번 바뀌었지만, 푸른 옷과 같이 했던 시간이 너무 행복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끝으로 수 없는 술자리를 너그러이 봐주고 해장국에 새벽밥까지 챙겨준 집사람, 별 탈 없이 장성한 자녀들에게도 “고맙고 사랑하며 앞으로는 내가 더 잘할 것을 약속한다”고 꼭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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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유선민 씨 - 현대미포조선 선체내업부 유윤상 기원 장녀]
[유선민 씨 - 현대미포조선 선체내업부 유윤상 기원 장녀]

안녕하세요, 현대중공업 가족 여러분! 저는 현대미포조선 선체내업부 유윤상 기원의 장녀 유선민입니다. 스무 살 때 ‘사우자녀 대학가다’라는 코너로 사보에 소개됐는데, 벌써 8년이 지났네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빠는 올해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십니다. 무뚝뚝한 경상도 아가씨라 평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사보를 통해 전합니다.

 

저는 종종 엄마와 함께 아빠가 퇴근하실 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마중을 나갑니다. 그때마다 아빠 회사 외벽에 적힌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라는 문구를 봅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이렇게 자신보다는 처자식을, 그리고 나라를 위해 한평생을 힘써 오셨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건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저 또한 ‘당연히 아빠니까 매일 출근하는 거야. 아빠는 그래도 돼’라고 생각하며, 매일같이 새 옷을 사면서도 아빠의 옷은 어떤지, 아빠의 신발이 얼마나 낡았는지는 사실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 출근하려고 차가운 자동차에 시동을 걸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에게도 이런 추운 새벽이 있었겠지’, ‘아빠의 땀과 노고로 그동안 부족함 없이 마냥 천진하게, 곱게만 살아왔으면서 한 번도 이런 생각을 못 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시렸습니다.

유윤상 기원과 선민씨
△유윤상 기원과 선민씨

아빠는 30년의 세월 동안 모두가 자고 있는 새벽에 집을 나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빠도 정말 출근하기 싫은 날이 많으셨겠죠. 아빠의 양어깨에 엄마, 선민이, 귀훈이, 정인이 이렇게 처자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그 무게는 또 오죽했을까요. 제가 직장인이 되어서야 마침내 아빠를 돌아볼 수 있게 됐습니다.

 

아빠는 이제껏 가족들에게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으시며 그저 묵묵히 뒤에서 바라봐 주셨습니다. “아빠 나 학교에서 1등 했어”라고 자랑해도 저에게 “그래 잘했다. 장하다”라고 말해주신 적이 없어 내심 서운할 때도 많았는데, 돌이켜 보면 아빠가 제게 해주셨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았죠.


고등학교 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가면 항상 아파트 통로에 나와서 저를 기다리고 계시던 모습, 사춘기 때 공부 안 할 거라고 투정 부리니 속상해 하시던 모습, 대학교 졸업할 때 “이제 한 놈 끝났네”라며 제 학사모를 쓰고 웃으시던 모습, 항상 양산까지 태워다주시며 “우리 딸이 일하는 병원이 이렇게 크네”하며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 대학원 진학한다고 하니까 누구보다 좋아하셨던 모습, 처음으로 사드린 운동화를 하도 신어서 밑창이 다 닳았는데도 차마 버리기 아까워 밑창을 고쳐 신던 모습, 결혼식 입장하기 전 떨리는 손을 제게 건네던 모습, 명절마다 전화해서 “시댁 가서 잘해야 한다. 시댁 안 갈 거면 이제 우리 집도 오지 마”하던 모습까지 전부 다 기억에 선
합니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표현이 서툴러서 말을 못했을 뿐 행여나 제가 사회에서 상처받을까, 아프진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며 걱정하신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빠를 생각하면 항상 애틋합니다.


“선민이는 아빠 배꼽에서 태어났어!” 하던 마냥 어렸던 딸이 어느덧 어엿한 직장인이 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뤘습니다. 엄마의 말씀처럼 아빠처럼 천사같이 좋은 사람 만나 공주처럼 예쁘게 살고 있습니다.

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30여년 동안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아빠가 이제는 저희 걱정을 내려놓고 엄마와 좋은 곳에 놀러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오롯이 본인만을 위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애 많이 쓰셨습니다. 오랫동안 건강하세요. 아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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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김상봉 기장 - 현대삼호중공업 판넬조립부]
[김상봉 기장 - 현대삼호중공업 판넬조립부]

올해 정년을 맞이하여 정들었던 현대삼호중공업을 떠나는 판넬조립부 김상봉입니다.
‘인생만사 회자정리(人生萬事 會者定離)’라 하지요.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회사생활에 대한 아쉬움과 소중함을 몸소 실감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5년 4월 현대삼호중공업에 첫 발을 딛었던 날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거제의 한 동종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당시, 영암 삼호읍에 큰 조선소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향이 해남인지라 현대삼호중공업으로 자연스럽게 입사하게 됐습니다.

 

자신감 하나로 살아온 그때의 저는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일명 ‘맨땅에 헤딩’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자동화로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예전 초창기 현장에서는 중장비를 들어 올리는 윈치(winch)가 부족해 선박 공정 지연 등의 문제가 간혹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건설공장에서 버리다시피 한 에어 윈치를 얻어다가 현장에 맞게 재조립한 후 사용했던 기억이 나네요. 덕분에 일손이 많이 줄었다며 좋아하던 팀원들의 웃는 모습이 여전히 기억속에 남아있습니다.
또한, 컨테이너 T-BLOCK 작업 중 재작업을 막기 위해 부서원들과 함께 애간장을 태우며 서로 밤낮 없이 연구한 일 등 회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옆에서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톡톡히 해주신 김환규 상무님과 멋진 팀원들이 있었기에 현대삼호중공업에서 25년의 생활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서원들과 종종 술자리를 가지다 보면 예전 즐거웠던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함께 바다로 놀러가 그물 털이를 한 후, 선상에서 맛보던 달콤한 회 한 점, 퇴근 후 야외에서 직접 구워 먹었던 불고기 숯불구이, 영광 불갑산과 해남 두륜산, 진도 여행 등 부서원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저절로 웃음이 지어지네요.

현장 선임자들과 지리산 정상에서
△현장 선임자들과 지리산 정상에서

팀원 가족들과 영광원자력 발전소 홍보관에서
△팀원 가족들과 영광원자력 발전소 홍보관에서

현대삼호중공업에 머무는 매 순간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또한, 힘들었던 일들도 저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됐으며, 마음 아팠던 기억들도 지금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혹시 저로 인해 마음 아팠던 일들이 있었다면, 업무를 잘하고 싶었던 의욕과 열정으로 인한 일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격려를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현대삼호중공업에서의 소중한 인연들과 사랑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제3의 인생’을 잘살아보겠습니다.


지역과 사회에서 현대삼호중공업이 든든하고 좋은 이미지로 거듭나길 기원하며, 다시 한 번 감사 인사 올립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판넬조립부 정말 사랑합니다. 

지난 30여년 동안 현대중공업 가족이어서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무궁한 앞날을 기원하며, 또 이 글을 읽고 계실 사우 여러분들에게도 행복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