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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 밀양서 황홀한 물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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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3

- 그냥 다 예쁜 봄

옛 사람들이 ‘쌀밥 같다’던 이팝나무꽃.

 

 

봄, 긴 시간이 아닙니다. 석 달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어쩌면 우리는 자연이 허락하는 황홀을 잠깐 훔쳐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팝나무에 꽃이 피고, 바람이 숨죽이는’ 그런 황홀이 어찌 무수(無數)하겠나. 생각해보면 세상의 시간은 가끔 꽃이 피거나 지는 속도로도 흘렀
습니다.


일본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초속 5센티미터'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벚꽃은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속도는 그런 것입니다. 짧으면서 길기도 한. 그러니 조금 더 천천히 지나가볼 일입니다.
경남 밀양은 산책하는 속도로 이팝나무 꽃피는 물가의 황홀을 흘려보내기에 좋은 곳입니다.

 

 

“너 그거 아니?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벚꽃이 땅으로 내려앉는 속도를 이렇게 수치화해 보여줍니다. 김선우 시인도 '마흔'이란 시에서 이와 비슷한 구절로 속도를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시속 100킬로 미터로 달려왔지만 여기서부터 나는 시속 1센티미터로 사라질테다’라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속도는 곧 ‘나’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속도로 풍경이 다가오고 멀어집니다. 이런 면에서 안도현 시인이 「발견」이란 산문집에서 말한 ‘속도를 줄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는 말은 유효합니다. 

무릇, 작고 소소한 풍경은 천천히 지나가야 보이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걸으며 꽃잎이 떨어지는 풍경을 보고 잠시라도 그 속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면 ‘내 삶의 속도’까지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시속 100킬로 미터일지, 시속 1센티미터일지. 

 

이팝나무 꽃은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핀다 

옛 사람들이 ‘쌀밥 같다’던 이팝나무꽃.
△ 옛 사람들이 ‘쌀밥 같다’던 이팝나무꽃.

사실 이 계절은 어디든 산책하기 좋습니다. 동네 앞 슈퍼마켓 가는 길도 산책로가 될 수 있고, 무른 논두렁이나 밭이랑도 이 봄엔 걷기 좋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풍경은 특별한 공간이 선물합니다. 밀양은 우리나라의 이름난 봄 여행지 중에서도 이맘때가 아름다운 곳 중 하나입니다. 특히 위양못에 이팝나무 꽃이 피는 풍경이 각별합니다. 이팝나무는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꽃을 피웁니다. 바람이 숨죽인 아침나절, 이팝나무 꽃이 하얗게 핀 못가를 산책해보세요. 못 하나에 주위를 둘러싼 풍경이 통째 담겨 있습니다. 

이 뿐일까. 밀양엔 유독 산책하기 좋은 물가가 많습니다. 영남루가 놓인 봄밤의 밀양강을 산책하는 일이며, 허브 향 가득한 꽃새미마을의 저수지 제방을 걷는 일 등이 하나 같이 즐겁습니다. 어쩌면 이 모두가 봄빛이 달콤하게 퍼지는 물가 산책이라 더 황홀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황홀’이 물가로 파문처럼 번지는 느낌입니다. 

 

경남 밀양
△봄날 위양못 가에선 바람에 청보리 흔들리는 소리도 들린다. △이팝나무꽃 필 때 위양못에는 창포꽃도 같이 핀다.

 

 

바람 한 점 없는 물가로 꽃이 톡톡 하르르 

위양못부터 찾습니다. 밀양시 부북면 화악산 아래에 있는 위양못은 아침 산책을 권할 만한 곳입니다. ‘양민을 위한다’는 의미의 양양지(陽良地)라고도 부르는데, 신라시대에 농업용 저수지로 축조됐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특별한 건 농사를 짓기 위해 축조한 저수지이면서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일까, 저수지란 공간에 ‘운치’와 ‘풍류’가 적절하게 가미됐습니다. 저수지에 다섯 개의 섬이 만들어진 것도, 주위로 왕버드나무와 이팝나무가 빼곡하게 심겨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다섯 개의 섬 중 하나만 섬인 채로 존재하지만, 아직도 위양못가에는 오래 묵은 아름드리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있어 운치있습니다.

경남 밀양
△봄날은 참샘허브나라가 온갖 색깔의 꽃으로 화려해지는 때다

바람이 잔잔한 봄날 아침, 이 못가에 서본 이들은 압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물 위에 새벽하늘이 담기고 산이 잠기고 나무가 잠겨 자맥질을 하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 풍경의 화룡점정이 완재정의 이팝나무입니다. 연못 중간 섬 가운데 있는 완재정은 1900년경에 안동 권씨 후손들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정자입니다. 이 정자 주변으로 매해 5월 초·중순경 이팝나무 꽃이 핍니다. 상상해보세요. ‘쌀밥 같은 꽃’이 솜사탕처럼 섬을 가득 채운 풍경을, 마침 물 위론 이팝나무 꽃그림자까지 깁니다.

위양못 산책로는 그런 못을 에둘러 한 바퀴 나 있습니다. 오래된 나무 사이로 푹신한 흙길을 자박자박 걷는 맛이 각별합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못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40분. 그러나 더 오래 머무세요. 걷다 어느 지점쯤에선 이팝나무 꽃이 바람에 떨어져 못으로 내리는 풍경을 지켜볼 일. 이팝나무 꽃이 떨어지는 속도는 초속 몇 센티미터일까요.

 

 

봄꽃은 달콤하고 봄물 짙은 강가는 환하다 

종남산에서 바라본 밀양시는 둥근 물길로 휘감긴 ‘물돌이동’이다.
△종남산에서 바라본 밀양시는 둥근 물길로 휘감긴 ‘물돌이동’이다.

위양못이 이팝나무 꽃으로 환할 때 꽃새미마을은 달콤합니다. 방동저수지가에 있는 꽃새미마을은 허브를 테마로 한 농촌체험마을로, 뒤로 종남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습니다. 종남산은 ‘물돌이’인 밀양 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입니다. 비록 물가는 아니지만 삼문동을 한 바퀴 휘돌아 흐르는 밀양강은 물론 이고, 그 인근의 영남루까지 조망할 수 있습니다.


저녁엔 밀양의 봄빛이 맑은 어둠 안에 잠깁니다. 영남루는 이시간쯤에 찾아 산책하기 좋은 곳입니다. 밀양 시내 한복판, 밀양강과 맞닿은 야트막한 구릉 위에 영남루가 풍치 있게 올라앉았습니다.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명루로 꼽히는 영남루는 낮밤 풍경이 두루 고운 곳입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온 누각의 웅장함이 밀양강에 잠겨 반짝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누각 저편에서 누각의 규모며 품격을 보며 밀양강 가를 산책하는 맛도 좋지만, 누각 위에 올라서서 발 아래로 펼쳐지는 밀양강의 전망을 누리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봄날의 호사입니다. 꼭 껴안으면 봄 지난 자리로 초여름 강이 슬며시 깃들 것 같습니다. 

 

글·사진 이시목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