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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 가을로 그린 쉼표 한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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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3

- 여행 에세이 ‘충북 괴산’

 

딱 이틀만 떠나기로 했습니다. 지도를 펼쳤습니다.
여유롭지만 허전하지 않은 곳, 눈부시지만 그렇다고 현란하지는 않은 곳, 그리고 무엇보다 큰 나무가 많은 곳.


손가락은 충북 쪽을 향했고, 콕 짚은 곳은 괴산이었습니다. 나무가 살기 좋아 사람까지 살기 좋다던 그곳 괴산.
역시 괴산엔 황홀한 나무그늘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 푹 쉬기 좋았습니다.

황홀한 나무 그늘, 충북 괴산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쉬다

느티나무는 사람들을 발밑으로 모읍니다. 그만큼 넓고 깊은 그늘을 가진 나무입니다. 괴산엔 이 느티나무가 유난히 많습니다. 심지어는 괴산(槐山)의 ‘괴’자도 ‘느티나무 괴(槐)’자다. 오죽이나 많았으면, 얼마나 무성했으면 느티나무가 지명으로까지 쓰였을까 싶습니다.

가을은 이런 느티나무가 물드는 계절입니다. 은은하고 소박한 노랑으로 시나브로 물듭니다. 울긋불긋 화려하지 않아 단번에 훅 끼쳐들지 않고, 잔잔하고 서서히 스며듭니다.

 

전법마을의 느티나무 숲이 그랬습니다. 처음엔 “뭐지?”라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았던 곳이 매년 찾는 안식처가 됐습니다. 공림사의 느티나무 숲도, 오가리의 세 그루 느티나무 아래도 그랬습니다.

그늘에 앉아있으면 바람이 불고 햇살이 스며들어 그저 좋았습니다. 눈에 닿는 풍경도 순해 눈이 피로하지 않았습니다.

 

그중 오래 앉아 쉬기 좋은 곳은 전법마을과 공림사의 느티나무 숲입니다. 전법마을의 느티나무 숲은 마을과 논 사이에 있습니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 30여그루가 빼곡해숲 전체가 온전한 가을 속입니다.

가끔 그 숲으로는 깨 터는 소리며 콩 타작하는 소리가 들리고, 멀리 개 짖는 소리도 들립니다. 예기치 않은 소리의 침입에도 신경이 곤두서지 않는 건 모두 순한 것들이어서입니다.

공림사의 느티나무 그늘도 전법마을만큼이나 깊습니다. 그보다 넓지 않은 대신 더 무성합니다. 마치 담장처럼 20여그루의 거목이 절을 폭 감싸고 있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듭니다.

 

“이 바위 위에 올라앉아 보시게.” 절의 주지스님이 말했습니다. 머리 위로 느티나무 그늘이 훌쩍 더 가깝게 내려앉았습니다. 스님 말씀으로는 995년 된 느티나무 거목이랍니다. 995번째 가을을 맞았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 ‘천년 느티나무’ 앞에 있는 바위. 공림사 최고의 쉼터로 손꼽히는 자리다.
▲ ‘천년 느티나무’ 앞에 있는 바위. 공림사 최고의 쉼터로 손꼽히는 자리다.

 

▲ 전법마을의 느티나무 숲은 논과 마을 사이에 있어 정겹다.
▲ 전법마을의 느티나무 숲은 논과 마을 사이에 있어 정겹다.

 

▲ 화양구곡의 2곡인 운영담 풍경. 계곡과 절벽의 어울림이 멋지다
▲ 화양구곡의 2곡인 운영담 풍경. 계곡과 절벽의 어울림이 멋지다.

 

 

 

 

여기, 물가에서 서성대는 가을

괴산은 산이 많기로도 유명합니다. 이 산들이 물을 뿜어 단풍이 고운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의역하면 단풍 고운 물가가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괴산엔 저수지 변을 가을 내 환하게 밝히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이 있고, 가을이 사는 산 속 호수가 있습니다. 전자는 양곡저수지 은행나무 길을 말하고, 후자는 ‘산막이옛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양곡저수지는 문광저수지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이름은 다소 평범하지만 저수지 한쪽을 샛노란 띠를 이루며 지나는 은행나무 길(300여미터)의 풍치가 뛰어난 곳입니다. 바람이 제법 세찬 날이면 곱게 익은 은행잎이 비처럼 떨어져 황홀해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저수지 풍경까지 고우니 금상첨화입니다. 새벽이면 청송 주산지처럼 물에 잠겨 자라는 버드나무 주위로 짙은 물안개가 피어올라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몇 년 전부터 시나브로 입소문이 나 호젓한 산책을 원한다면 새벽 무렵에 찾을 일입니다. 걷다 잠시 눈을 감으면 수면 위로 툭툭 은행잎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절정기는 10월 20일~25일경입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산막이옛길은 걷기 좋습니다. 산막이옛길은 괴산군 칠성면 사오랑마을과 산막이마을을 오갔던 옛길을 다듬어 ‘걷기 좋게’ 만든 10여리(편도 1시간 30여분) 길입니다.

그런데 길을 기준으로 한쪽은 산이고 다른 한쪽은 호수(괴산호)입니다. 그 아찔한 길에 나무 덱을 놓고 군데군데 전망대를 설치해,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걸으며 호수와 산을 누릴 수 있게 했습니다.

 

호수는 배를 타고도 즐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막이마을로 갈 때 걷고, 사오랑마을로 되돌아올 때 배를 탑니다. 호수에서 보는 산자락엔 가을이 짙고, 배에서 보는 호수엔 산자락이 통째 잠겨 있습니다. 

 

▲ 공림사의 느티나무 숲은 짧지만 울창해 그늘이 더욱 짙다.
▲ 공림사의 느티나무 숲은 짧지만 울창해 그늘이 더욱 짙다.

 

 

 

가을 계곡에서 듣는 옛 이야기

우리나라 어디든 빼어난 계곡엔 오래된 이야기들이 깃들어있습니다. 대부분 구곡(九曲)이란 이름이 붙은 곳들입니다. 괴산에도 구곡이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화양구곡부터 선유구곡, 쌍곡구곡, 연화구곡, 갈은구곡 등이 그것. 이 중 가을엔 화양구곡과 쌍곡구곡의 풍치가 좋습니다.

화양구곡은 울창한 숲과 맑은 물, 너른 반석과 기암괴석이 어울린 4킬로미터(km) 가량의 계곡입니다. 조선중기 좌의정을 지낸 송시열이 성리학을 공부하며 거닐던 곳으로, 화양천 입구부터 계곡을 따라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파천 등 9개의 절경이 이어집니다.

 

첫손에 꼽히는 절경은 4곡인 금사담입니다.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가루 같다고 해 이름 붙여진 금사담엔, 송시열이 책을 읽고 시를 읊었다는 암서재(정자)가 서 있습니다. 누가 봐도 탄성이 절로 일만 한 풍치입니다.

화양구곡의 또 다른 매력은 길에 있습니다. 치마주름처럼 들락날락 휘어지는 물길을 따라 걷는 길인 데다, 길이 넓고 평탄해 깊은 가을을 호흡하며 걷기 좋습니다. 들숨 한 번에 가을이 후루룩 들고, 날숨 한 번에 스트레스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입니다.

 

* 글·사진: 이시목 여행작가

▲ 쌍곡구곡의 백미로 불리는 쌍곡계곡에도 가을이 깊다.
▲ 쌍곡구곡의 백미로 불리는 쌍곡계곡에도 가을이 깊다.

 

▲ 산자락에 폭 안겨 있는 괴산호. 산막이옛길은 호수와 산을 동시에 누비는 길이다
▲ 산자락에 폭 안겨 있는 괴산호. 산막이옛길은 호수와 산을 동시에 누비는 길이다.

 

 


 

Travel Tip
괴산의 맛집

괴산의 맛집
 

아무래도 괴산하면 올갱이해장국부터 떠오릅니다. 괴산읍내를 흐르는 괴강에서 잡은 다슬기(올갱이)로 끓여내는 해장국인데,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 오래된 맛집들이 몰려 있습니다.
이 중 ‘할머니네 맛식당’(☎043)833-1580)은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등장했던 곳. 올갱이해장국과 올갱이무침이 메뉴의 전부입니다. 최근엔 ‘괴강올갱이전문점’(☎043)832-1144)도 맛집으로 자주 회자됩니다.
매운탕 맛집으로 알려진 ‘오십년할머니집’(☎043)832-2974)도 찾는 이가 많은 곳. 충청도식 된장찌개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호산죽염식품’(☎043)832-1388)에서 운영하는 산채한식당을 찾는 것도 괜찮고, 조금 더 느긋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이라면 ‘얼음골 봄’(☎043)833-9117, 농가맛집)을 찾는 것도 좋
습니다. 얼음골 봄은 산야초의 일종인 ‘지칭개’를 넣은 오리백숙을 내는 집으로, 예약이 필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