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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 봄 따라 자박자박

현재위치
2020-03-12

- 경남 하동 토지길

부쩍 환해진 볕에 코끝이 따스해졌습니다. 볕 따라 하동으로 향했어요. 볕이 내려 환하고 따스한 곳은 코끝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동에선 이미 그 볕에 매화가 팝콘처럼 터지기 시작했고, 산수유꽃도 노란 구름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달 하순이면 섬진강을 따라 벚꽃이 우르르 터져 연분홍빛 폭죽 같지요. 하동을 보니 바깥은 이미 걷기 좋은 봄입니다.

 

 

봄을 걷다 - 느리게 풍경을 음미하며 걷는 ‘토지길 ’

우리나라 최고령 차나무가 있는 도심다원 풍경

혹자는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벚꽃 없는 계절에 하동 행(行)이냐?”고. 딱히 벚꽃 피는 계절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동의 봄날은 곱지 않지 않은 날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도 굳이 한 가지 이유를 꼽자면, ‘조금 더 한적했으면’ 입니다. ‘봄은/봄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의/가장 낮은 목소리로 온다’(오세영의 시 <봄> 중에서)던 오세영 시인의 말처럼, 조용히 낮게 ‘봄’이라고 툭 읊조려도,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적요한 시간을 오롯이 걸어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죠.

그러다 문득 눈처럼 휘날리는 벚꽃이 그리워지면, ‘4월 초순께 다시 오자’는 약속을 혼자 가만히 되뇌며 달래면 족할 일입니다. 지금 이 계절엔 그래서 오로지 강이고 들입니다. 때때로 꽃을 만나고 보리밭을 지나고 야생차밭을 거닐죠.

하동의 그런 봄날을 가장 느긋하고 적절하게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은 ‘토지길’을 걷는 것입니다. 문화생태탐방로인 토지길은 슬로시티로 지정된 악양면 일대를 크게 휘도는 도보길입니다. 코스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를 밟아가는 1코스와 십리벚꽃길을 아우르는 2코스 총 2개가 있습니다.

이중 1코스는 평사리공원에서 부부송(동정호)~최참판댁~입석마을~조씨고가~취간림~악양천 제방을 지나 평사리공원으로 되돌아오는 원점 회귀 코스로, 18킬로미터(5시간가량 소요) 거리입니다.

하지만 가볍게 걷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라 이럴 땐 평사리공원에서 고소성과 최참판댁을 잇는 산길을 지나 악양들(부부송, 동정호)을 경유해 평사리공원까지 걷는 원점 회귀 코스가 적당합니다. 1코스의 핵심만 가려 뽑아 걷는 길이라 지리산과 악양들과 섬진강을 두루 즐기며 지나기 좋습니다.

“전망이 참 좋지요” 고소성은 토지길 중에서 풍경이 가장 너른 자리인데요. 어깨 주위론 산자락이 너울너울 걸리고, 발아래로는 몸 푸른 섬진강이며 푸릇한 악양들이 밟힙니다.

악양들 한가운데에는 부부송과 연둣빛 반영이 아름다운 동정호도 있습니다. 부부송도 눈에 띄지만, 악양루와 호안을 따라 어우러진 나무들의 연둣빛 몸체가 발아래서 반짝거리는 풍경을 보는 일이 좋아서요. 급할 게 없다면 성곽 위, 봄볕 질펀한 어디쯤에 앉아 그 풍경을 오래 바라봐도 좋을 일입니다. 마음이 어느 때보다 평화로울 것입니다.

고소성에서 최참판댁은 산길을 따라 20여분 걸어 내려가면 도착합니다. 최치수의 헛기침 소리가 들릴 듯 생생한 소설 속 무대이자 TV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인 최참판댁. 이곳에서 봄은 기와가 가지런한 사랑채 처마 밑에서 꽃으로 피고, 용이네 집 초가 밑에서 보리로 자랍니다. 볕 좋은 담장 쪽 매화는 이미 흐드러졌고, 목련이며 개나리도 꽃잎을 열어 일대가 다 환합니다.

 

 

봄을 맡다 - 봄 햇살 아래 눈부신 초록 파도, 야생차밭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매원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매암다원 풍경

토지길 2코스는 쌍계사와 십리벚꽃길, 야생차밭을 아우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화개장터~십리벚꽃길~차 시배지~쌍계석문바위~쌍계사~불일폭포~국사암을 잇는 13킬로미터(3시간 30분가량 소요) 길이의 도보길이죠. 이중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소문난 벚꽃로드인데요. 4월 초순이면 왕벚꽃 수십 그루가 양쪽 길가에 다발로 피어 황홀경을 이룹니다. 하지만 이맘때 이 길은 ‘사람 몸살을 앓을’ 만큼 찾는 이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이 길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은 새벽이나 한밤에 이 길을 걷거나, 꽃이 피기 전이나 진 뒤에 찾는데요. 3월 중·하순경 이 길에서는 벚나무가 한껏 봉오리를 부풀려 연분홍빛으로 물들고, 산수유와 매화가 꽃망울을 열어 차밭 일대를 밝히는 덕이지요.

그렇다고 꽃에만 눈길을 두진 말아요. 화개천을 따라 칠불암 권역까지 길게 이어지는 야생차밭이 또 다른 주인입니다. 일부는 화개천변을 따라 넓게 펼쳐지지만, 대게는 물가 비탈을 따라 펼쳐집니다. 비탈을 따라 슬금슬금 꼬불꼬불 이어진 초록 이랑이 봄볕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는 일이 좋습니다.

특히 곡우 이전, 비탈에 층을 이루어 차를 수확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여행지로 단장돼 있지 않아 방문이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요. 이럴 땐 하동군에서 선정한 다원8경을 찾으면 됩니다. 차 시배지, 명원다원, 고려다원, 삼우다원, 도심다원, 쌍계야생다원, 차공간, 매암다원 등이 그곳입니다.

이중 필수 코스는 ‘대렴공 차시배 추원비’가 세워져 있는 차 시배지와 우리나라 최고령 차나무가 있는 도심다원, 매암차박물관이 있는 매암다원 세 곳입니다. 이 중 매암다원은 차를 공부하고 따고 마시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초록빛으로 굼실대는 차밭에서 차향을 듬뿍 맡고 오기 좋아요. 차에 봄볕을 가득 담아 마셔도 좋을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