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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 이 땅, 만추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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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9

- (여행에세이)경남 함양군

 

늙어 오래된 것들이 풍기는 냄새는 편안해요. 천년의 숨결이 깃든 나무 냄새가 그렇고, 잘 늙은 고택 한 채에서 묻어나는 오래된 나무냄새가 그렇죠. 오래 묵어 무람없는 인연처럼 따사롭고 편안한 느낌. 함양엔 그렇게 오래돼 멋스런 풍경이 가득합니다.

11월 초‧중순이면 노랗게 물들어 환해지는 ‘운곡리 은행나무’

 

지리산 자락에 등을 기대앉은 함양 땅에선 11월 하순까지 낙엽이 바스락거리는데요.

올해는 ‘가을 긴 함양 땅’으로 언택트 여행을 떠나봐요. 단출하고 조심스럽게요.

 

 

환한 나무 그늘 아래를 걷다

이 가을 그러니까 11월하고도 중순, 상림을 찾는 사람은 행복해요. 이 땅에서 가장 예쁜 숲, ‘가을 머문 천년의 숲’을 거닐 수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예쁘다는 단어만으로 상림의 가을을 설명한다는 건 왠지 우스워요. ‘장님 코끼리 만지 듯’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만큼 상림은 거대하고 분위기 또한 다채롭습니다.

 

자연림처럼 보이지만 상림은 천 년 전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공림이에요. 길이 약 1600m에 폭 100~200m에 이르는 장방형의 숲으로, 우리나라에서 인공림으로는 가장 오래됐어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지만 최고의 비경은 단풍 내린 가을. 그 중에서도 일부는 낙엽이 되어 쌓이고 일부는 단풍으로 하늘을 채운 11월 초‧중순입니다.

상림의 산책길
▲ 계절적으로 11월이 상림을 여행하기에 최적인 때라면 시간적으로는 새벽녘이 ‘강추’할만합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여 분. 걸을 때마다 발치께서는 낙엽 바스라지고 하늘로는 햇살 따습죠.

산책 코스는 함화루에서 사운정을 거쳐 물레방아까지인데요. 숲 속과 숲 밖 어디든 호젓한 산책로와 벤치가 있어 낙엽을 밟으며,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산책하기 좋습니다.

 

어디 햇살 따스하게 내리쬐는 벤치쯤에선 아예 눈을 감고 앉아 바람을 느껴 봐도 좋을 일입니다.

스산한 바람에 후두둑 낙엽-비 쏟아지는 소리며, 잘 튀긴 부각처럼 좋은 향이 나는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죠. 함양엔 상림보다 더 오랜 이야기를 품은 나무도 있습니다.

농월정 앞 너럭바위 계곡
▲ 화림동계곡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농월정 앞 너럭바위 계곡

 

‘운곡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406호)’다. 짐작되는 수령만도 1,300년인 이 나무는 상림의 단풍이 절정을 이룰 무렵 샛노랗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고요. 키가 34m가량으로 크고 둘레 또한 8.5m 정도로 두꺼워, 한품에 껴안거나 그 끝을 가늠해보기 버거울 정도입니다.

 

어느 해 가을, 지인은 이곳에서 ‘노란 눈 폭탄’을 맞았노라며 호들갑을 떨었어요.

바람이 많은 날이라면 누구라도 그 풍경과 조우할 수 있어요. 다만 단풍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방문 전에 미리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잘 늙어 고운 집들을 만나다

잘 늙은 집은 ‘오래된 건물’ 이상의 가치를 지녀요. 함양엔 선비문화로 상징되는 고택과 서원, 정자가 많아요. 고택은 개평마을에 밀집돼 있고 정자는 화림동계곡에 즐비해요. 남계고택과 청계서원 등 함양을 대표하는 두 서원은 수동면 원평리에 이웃해 있습니다.

먼저 찾을 곳은 화림동계곡이에요. 서울에서 남하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화림동계곡은 본래 ‘팔담팔정’으로 이름을 날렸던 곳이에요. 지금도 이곳에 8개의 정자가 있어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는 ‘호남의 정자는 자연과 흔연히 일치하는 조화로움과 아늑함을 보여주는데, 영남의 정자는 자연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고 설명했어요.

야경 촬영 명소로 소문난 지안재
▲ 야경 촬영 명소로 소문난 지안재. 오도재라고도 부른다.

 

실제로 화림동계곡을 따라 펼쳐진 선비문화탐방로(1코스)를 걸으며 만나는 정자들은 자연을 압도해요.

 

첫 탐방지는 거연정이에요. 거연정은 총 6.2km(1코스) 길이로 조성된 선비문화탐방로의 시점으로, 들쭉날쭉한 바위에 주초석으로 높낮이를 맞춰 세웠어요. 깊은 담 곁에 날렵하게 올라앉아 그 풍치가 호기롭습니다.

 

거연정에서 군자정과 영귀정을 지나 만나는 동호정도 멋스러우며 차일암(너럭바위)을 마당으로 둔 동호정은 그저 쓱 깎아 걸친 듯 결이 거친 나무계단과 천장이 인상 깊어요. 동호정에서 계곡을 따라 1시간여를 더 가야 닿는 농월정은 선비문화탐방로의 화룡점정입니다.

 

‘밝은 달밤에 한 잔 술로 계곡 위에 비친 달을 희롱한다’는 이름처럼 절경을 자랑하던 정자였는데, 몇 해 전 화재로 소실됐다 최근 복원됐어요. 맑고 풍성한 계류를 끼고 펼쳐진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쉬는 재미가 좋아요. 개평마을과 남계서원은 정여창을 중심으로 한 공간입니다.

벽송사의 서암
▲ 바위에 조각된 부처들로 유명한 벽송사의 서암

 

정여창이 태어나 자란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의 집성촌에는 100년이 넘는 고택 60여 채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누군가 ‘오래된 집엔 그 집을 살다간 사람들의 역사와 정신,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했어요. 정여창 선생의 집인 일두고택을 찾으면 그가 강조했던 충과 효의 정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솟을대문에 걸려 있는 충·효 정려편액 5점에 깃든 이야기가 특히 많아요. 건물 자체도 눈에 띄어요.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 보세요. 수령 300년 된 소나무가 용틀임을 하며 뻗어나간 자태가 눈부시죠. 나이 먹은 담장을 따라 마을을 휘돌면 오래된 집들이 전하는 다른 이야기에도 빠질 수 있습니다.

 

현재 대부분 고택에서 한옥스테이를 운영해 개평마을에서 하룻밤 아늑하게 묵어가는 것도 좋아요.

개평마을에서 남계서원은 4km 거리에요. 정여창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사액서원이에요. 구조가 단순하고 꾸밈이 소박하지만 함양 선비 문화의 기둥뿌리입니다.

 

풍영루 2층 누마루에 앉아 서원 일대를 바라보면, 문득 그들이 배우고 가르치고 토론하던 것들이 궁금해지는데요. 그 내용 중 하나였을 것들이 풍양루에 단청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큰 산 아래 절집에 깃든 만추

함양은 지리산으로 드는 길목이기도 해요. 지리산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에요.

그 너르고 큰 그늘에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마천이라고 해요. 함양 읍내에서 마천은 지안재를 넘어야 해요. 지안재는 옛 함양 사람들이 삼남지방의 장돌뱅이들을 만나는 장터목으로 가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울며 넘던 고개.

서암보다 주위 단풍 빛이 고운 벽송사

 

길이 뱀처럼 굴곡져 보기에도 아찔한데, 고개 정상 즈음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서면 그 아득했을 시간들이 굽이져 보여요. 가까스로 지안재를 넘고 나면 칠선계곡 입구에서 벽송사 가는 길을 만납니다.

벽송사의 명물은 단연 서암인데요. 1989년 만들어진 석굴법당인 서암은 바위에 조각된 부처들로 유명합니다.

 

특히 경주 석굴암을 연상케 하는 석굴법당 안에 조각된 불상조각이 섬세하고 이채로워 놀라워요. 조각이 섬세한 것은 물론, 이색적이기까지 해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 해요. 서암의 유명세에 가려 있어 찾는 이 드물지만, 벽송사에도 가을 산사의 운치는 가득히 내려앉았습니다.

 

 * 글‧사진 _ 이시목 여행작가

 


Travel Tip
함양의 맛집

오곡밥정식

 

30여 년 전통의 어탕국수집인 조샌집(055-963-9860)이 함양군청 인근에 자리하고 있어요. 민물고기를 푹 고아 만든 어탕에 국수를 넣어 끓여 내는데, 걸쭉하면서도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죠.

오곡밥정식으로 유명한 늘봄가든(055-962-6996)과 연잎밥을 내는 옥연가(055-963-0107)도 상림에서 가깝습니다.

 

선비문화탐방로를 간다면 가까운 안의면 소재지에서 허기를 채울 일이에요.

 

안의는 갈비탕과 찜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안의면 소재지에 있는 삼일식육식당(055-962-4492), 안의원조갈비집(055-962-0666) 등이 맛있는 집으로 알려져 있어요.

 

마천에서는 흑돼지구이가 별미라고 해요. 맛있기로는 마천면의 월산식육식당(055-962-5025)이 으뜸이란 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