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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I뉴스 - 아산의 무한도전,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건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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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2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고 담대하게 도전해라”

 

1960년대까지의 국내 조선 기술은 목조 선박이나 소형 유조선·화물선을 건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1972년, 울산 미포만에 등장한 조선소가 대한민국 아니 세계 조선업의 역사를 다시 썼습니다. 최대 건조능력 3만 DWT급에 불과하던 우리나라 조선업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 건설과 초대형 선박 건조의 동시 진행했습니다. 정주영 창업자는 그렇게 세계 무대에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현대울산조선소 선박건조 시업식에서 연설

조선소 건설의 서막 “우리는 300년전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습니다”

1960년대에 국내외 각종 대형공사를 통해 건설업계 정상의 위치를 차지한 현대에게 1970년대를 맞아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마련해 줄 업종으로의 진출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아산은 1960년대 말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방향으로 정해진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기회라 생각하고, 울산 미포만에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세워, 한국 경제 구조를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변화,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소 건립을 위해서는 대규모의 투자가 꼭 필요한 상황. 조선업 경험이 전혀 없던 현대가 이를 위한 투자를 유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그러나 아산은 ‘건설업에서 충분히 쌓은 우리 기술력이면, 조선사업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울산 미포만 축적지도(5만분의 1)와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면을 들고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영국 ‘버클레이’ 은행에 찾아가 우리 돈 약 208억원에 달하는 차관을 도입하고자 했지만, 은행의 최종 입장은 거절이었습니다. 계속된 투자 유치 난항 속에서, 아산은 선박 컨설턴트 회사 ‘A&P 애플도어’사에 찾아갑니다.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의 은행으로 부터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롱바톰 회장도 이전에 만난 투자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의 조선소 건설에 난색을 표하던 롱바톰 회장에게 아산은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들고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르키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선 16세기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잠재력을 지폐 속 거북선으로 보여준 아산.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살펴보던 롱바톰 회장은 마침내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후 롱바톰 회장은 한국을 방문해 직접 현대의 시공능력과 경험을 검증한 뒤 창업자에게 추천서를 써주게 됩니다. 애플도 어사의 추천서를 손에 넣고 버클레이 은행을 다시 찾아갔지만 차관을 받는 일은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은행이 차관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영국 수출신용보증국 (ECGD)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그들은 아무리 큰 조선소가 있어도, 배를 사는 사람이 없으면 수익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차관 승인이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수출신용보증국은 차관 승인을 위해서는 배를 살 사람, 즉 선박 수주 계약서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조선소에다 선박을 발주할 선사가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고민하던 창업자는 마침 롱바톰 회장으로부터 그리스 썬엔터프라이즈사의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1971년 10월, 리바노스 회장을 찾아간 아산은 파격적인 계약조건을 제시하며 마침내 26만톤급 초대형 유조선 2척에 대한 공급계약을 체결합니다. 정주영 창업자의 담대함과 기개, 그리고 기업가로서의 의지와 개척정신이 리바노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한꺼번에 하지 뭐!

현대는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으로부터 차관을 승인받아 드디어 조선소 건설에 착수하게 됐습니다. 1972년 3월 23일 오후 2시 울산 미포만 백사장. 현대 임직원과 각국 대사, 시민 등 5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8천만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현대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열린 기공식은 대한민국 조선업이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음을 선포하는 상징적인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간에는 ‘조선소 건설에만 3년, 완공된 조선소에서 선박 건조에만 2년을 합쳐도 족히 5년은 걸리는데, 유조선 2척 인도가 제때 가능하겠느냐’ 등의 잡음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아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조선소는 조선소이고 선박 건조는 선박 건조라는 것. 그의 표현을 빌리면 ‘조선업이라는 것은 철판으로 큰 덩치의 탱크를 만들어 바다 위에 띄우는 건축공사에 불과하다’며, 그는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짓는 사상 초유의 발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건국 이래 최대였던 520억원의 공사비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만 해도 세계 최대 규모였던 26만톤급 유조선을 맨땅에서 지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현대의 사운(社運)을 건 승부수였습니다. 아산은 다른 공사에 꼭 필요한 것을 빼고는 그룹의 모든 장비를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 현장에 투입했습니다.

‘잠 다 자고 어느 세월에 선진국 따라잡나!’라는 철칙대로, 그는 야간 통행금지가 적용되지 않는 고속도로 차 안에서 서울-울산을 오가는 시간 동안 쪽잠을 자며 밤낮 없이 조선소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새벽 폭우 속에서 현장으로 가는 길에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을 고비도 넘기고, 공장도, 도크도 없이 모래를 퍼내가며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를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평의 공장을 세웠습니다.

1974년 2월 울산 미포만. 모래사장밖에 보이지 않던 허허벌판에 우뚝 선 울산조선소가 만들어 낸 초대형 유조선이 바다 위에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이후 1974년 6월에는 울산조선소 준공식과 함께 초대형 유조선 2척의 명명식이 개최됐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 조선소와 세계 최대 규모 선박이 대한민국에서 탄생했음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2년 3개월 만에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26만톤급 유조선 2척을 건조해내는 세계 조선사에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기면서 말입니다. 현대의 조선산업 진출은 처음부터 세계 무대를 상대로 펼친 도전으로, 우리 경제의 새로운 활로 개척에 이바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와 함께 ‘현대조선’의 성공으로 대한민국의 조선기술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게 되면서 이후부터 국내에는 수많은 조선소가 들어섰습니다. 무모해 보일 수 있어도 실상은 치밀하고 담대한 그의 도전정신이 오늘날 세계 1위 선박 건조 기업 ‘현대중공업그룹’을 있게 했으며, 아직도 그의 ‘현대정신’은 우리 가슴속 깊이 기억되고 있습니다.